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버닝(한국 영화) (문단 편집) === 각 상징적 요소들에 대한 해석 === * '''각 주인공들의 집''' 종수는 [[경기도]] [[파주시]] 만우리, 해미는 [[서울특별시]] [[용산구]] [[후암동]], 벤은 서울 [[서초구]] [[반포동]] [[서래마을]]에 산다. 종수의 집은 대남선전방송이 들릴 정도로 소란스러운 삶의 터전이다. 내부는 종수를 옭아매는 과거가 있지만, 외부는 자유로운 새들과 노을을 바라볼 수 있는 공간으로 애매한 경계에 서 있어 혼란스러운 종수를 대변한다고 할 수 있다. 해미의 방은 북향이라 대부분의 시간 동안 어두워서 운 좋게 [[남산타워]]에 반사되는 빛이 들어올 때만 햇볕을 쬘 수 있다. 벤의 터전은 종수와 해미의 집과 완벽하게 대치된다. 부의 상징임과 동시에 종수를 한없이 불편하게 만든다. 하지만 벤은 소란스럽고 초라한 종수의 집에서 그저 경치가 좋다며 무드를 잡고, 살려고 음식을 차려먹는 종수와 달리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기 때문에[* 일은 뭐 하냐는 질문에도 벤이 내놓은 대답은 그저 '놀아요' 수준의 대답이었다. 즉 벤은 현재 매일매일 직장 없이 자기 맘대로 놀고 다녀도 그 '노는 행위'를 계속 할 수 있도록 뒷받침해줄만한 재력이 존재하며, 지금 당장 뭔가에 절실히 매달리지 않아도, 혹은 경제적 결핍상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에 매달려야 하는 처지가 전혀 아니라는 것이다.] 취미로 요리를 하며, [[용산참사]]의 비극을 담은 예술품이 있는 곳에서 여유롭게 값비싼 식사를 하는 등 누군가에게는 치열한 삶과 그 터전을 재미/흥미로만 바라본다. 불합리한 현실을 은유적으로 얘기한 것이자, 벤의 대사처럼 가진 자들은 있는 것을 '제물'처럼 즐긴다는 것의 메타포. 더불어 벤이 타고 다니는 포르쉐도 종수의 낡은 트럭과 달리 부의 상징일 수 있다. * '''[[남산타워]]의 빛''' 현실과는 다른 한줄기 희망이라고 보는 경우가 있다. 하지만 여기서 더 나아가 보면, 남산타워의 빛은 사실 빛이 아닌 허상일 수가 있다. 햇빛처럼 보이지만 진짜 햇빛이 아닌 것처럼. 희망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허상에 지나지 않을 수 있고, 종수는 빛의 근원을 알지 못한 채 실제인지 허구인지 판단할 수 없는 그 빛을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여담으로 한 방송에서 백은하가 이와 같은 해석을 내놓자, 함께 진행하던 [[조우종]]이 들어올 때는 내 돈 같지만 내 돈이 아닌 것처럼 잠깐 사이 빠져나가는 월급으로 비유했다.] * '''[[용산참사]] 그림''' 벤이 가족들과 식사를 하는 장소에서 종수가 보던 그림은, 용산참사를 주제로 한 작품이다. 정확히는 화가 임옥상의 <삼계화택-불>이다. 사회적 비극도 소비 대상으로 소모된다는 세태 비판이자, 벤 같은 유산계급은 사람이 불에 타 죽는 것을 유희로서 소비할 수 있다는 은유다. * '''고양이, 송아지, 새 떼''' 고양이는 [[슈뢰딩거의 고양이]]의 메타포. 이 고양이를 종수가 보일이라 부름으로써, 종수에게 해미의 고양이라는 사실이 관찰되고, 고양이가 존재한다는 현실이 확정된다. 또한, 고양이 이름의 원인이 된 보일러는 사람이 다루는 화기 중 가장 불이라는 것이 떠오르지 않는 물건이다.(실제 보일러 속 불을 본 사람은 거의 없듯이). 다르게는 'boil' 그대로 보아 '분노가 끓다'로 해석하기도 한다. 송아지는 종수에게 내재된 폭력성과 반대 방향에 있는 순수성으로 보기도 하고, 종수를 옭아매는 현실 그 자체로 보기도 한다. 파주집은 종수가 떠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송아지 밥을 주기 위해 이사를 한다. 떠나고 싶은 세상이지만 송아지 하나 때문에 떠날 수 없는 상황을 의미하고, 그래서 종수가 송아지를 파는 건 행동 개시의 전초전이라는 것. 새 떼는 자유롭고자 하는 해미. * '''[[비닐하우스]]''' 벤의 "연기처럼 사라졌어요."라는 대사 때문에 해미라고 보는 관점이 있다. 하지만 벤의 살인을 확정지을 수 없는 상황에서 오히려 종수나 무형적인 것에 가깝다. 벤은 모호한 말을 늘어놓으며 재미만을 추구하기에 그의 말은 신뢰할 수 없다. 오히려 영화 내내 비닐하우스에 불을 지르는 건 종수이다. 흔해빠진 것,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 존재로서 해미, 종수 모두 해당 된다. 결국 태워진 것은 다른 어떤 것도 아닌 종수의 욕망이자 '베이스'이기 때문이다. 종수가 비닐하우스를 하나하나 조사해 나갈 때 투명해 보이지만 안에는 잘 보이지 않음을 확인하는 장면이 있는데, 이때 종수의 옆으로 또 다른 검은 종수의 그림자가 스치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비닐하우스는 영화의 주요 테마인 '모호함', '불분명함'을 형상화시킨 것으로도 볼 수 있다. 비닐하우스는 언뜻 투명해 보이지만 가까이서 안을 들여다 보려고 하면 잘 보이지 않는다. 극중에서 종수가 찾아다니는 비닐하우스들은 모두 텅 비어있어서, 비닐하우스의 문을 열고 본다 해도 종수에게 미스터리를 풀 실마리를 제공해 주지 않는다. 그래서 비닐하우스는 종수가 그토록 알아내고 싶어하지만 알 수 없고, 도처에 존재해 언제라도 꺼내볼 수 있을 것 같지만 쉽게 찾아낼 수 없는 세상의 진실을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다. 이를 비추어 볼 때, 종수가 비닐하우스와 진실에 대해 쓸모없는 것이라 여기고 무관심했다면 아무 일도 없었겠지만, 계속 실체를 찾아나가고 진실을 알려고 했기에 집착과 분노가 생겨났다고 생각할 수 있다. * '''리틀 헝거 & 그레이트 헝거''' 종수는 리틀 헝거, 해미는 그레이트 헝거가 되고 싶어하는 리틀 헝거이다. 반면에 벤은 그레이트 헝거로 치환 가능하다고 보는 해석도 있지만, 벤이 극중에서 뭐든지, 심지어 대남방송까지도 재미있다고 반응하는 것이나 '일하는 것과 노는 것의 경계가 없다'고 말하는 부분에서 삶의 의미를 찾는 그레이트 헝거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유희만을 추구하는 벤 보다는 매사에 진지한 종수나 한단계 높은 차원을 꿈꾸는 해미가 그레이트 헝거일 수 있다. * '''우물 이야기''' 해미가 종수에게 해주는 우물에 관한 이야기는 실제와 허구가 뒤섞이며 과연 무엇을 사실로 믿고 기억해야 하는지 어렵게 한다. 종수는 기억 못하는 우물에 관한 이야기를 애틋한 감정을 담아 전하는 해미 때문에 믿게 되었지만 이후 주변인들과의 대화에서 우물이 있지도 않았다는 말을 들으며 진실을 잃어버린다. 이후에는 다시 종수의 엄마가 우물이 있었다고 말하면서 진짜인지 아닌지 더욱 모호하게 만들어 버린다. 우물 이야기는 사람이 실제든 허구이든 진실을 받아들일 때 선택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종수가 벤을 살인자로 믿는 것처럼. 우물 자체에 대해서는, 실재를 증언하는 유이한 인물인 해미와 엄마가 카드빚과 급전이라는 공통점이 있어 일종의 허영으로 보는 해석도 있다. 하지만 이 우물을 인물들의 처지에 대입하면 어두컴컴한 곳에 갇힌 상황, 그럼에도 남산타워의 빛처럼 한 줄기 빛이 새어나오는 현실로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을 이해하는 종수는 우물의 존재를 믿으려 하고, 결국 자신이 듣고 싶어했던 얘기를 해주는 엄마의 말을 믿고[* 종수는 이전부터 우물이 있다고 믿고 싶어했다. 만나자마자 자신에게 돈을 요구하는 엄마의 말이라도 종수에게 중요한 것은 우물이 있다고 얘기해주는 사람이 한 명이라도 있는 것이다. 또한 달리 보면 엄마도 우물에 갇혀서 구출을 원하는 상황에 있다고 볼 수도 있다.] 비로소 미스터리에 대한 자신의 결론을 내놓는다. 덧붙여 해미가 우물 속에서 구출을 원하고 있음을 비유한다고 볼 수도 있다. 그런데 이창동의 인터뷰[* "해미에게도 자신만의 서사가 있다는 말을 하고 싶었다. 사람은 누구나 서사가 있다. 만약 그 얘기가 해미에 의해 만들어진 얘기라면 왜 해미는 그런 얘기를 만들어서 품고 다닐까. 그 질문을 관객들에게 던지겠다."]를 참고해 본다면, 오히려 해미는 구원 자체가 비현실적이니 자신이 원하는 대로 이야기를 만들어 삶을 지탱해 왔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이것은 (해석에 따라 실제, 소설, 상상 등으로 갈리지만) 어떤 방식으로든 미스터리를 풀고 자신만의 서사를 확정한 종수의 선택과 맞닿는다. 이런 해석을 통해 우물뿐만 아니라 종수가 쓰는 소설도 허영으로 볼 수도 있으나, 이들이 이렇게 허구의 이야기를 펼쳐나갈 수밖에 없는 상황[* 종수는 탄원서에도 약간의 허구를 담아 썼다.]을 생각한다면, 허영이 아니라 삶을 버티는 방법 중 하나는 아닌지 질문이 남게 된다. * '''종수의 꿈''' 이걸 종수의 꿈이 아니라 벤의 어릴 적이라고 보는 시각도 있지만 그럴 가능성은 낮다.[* 엔딩 크레딧에 '어린 종수'라고 명시되어 있기 때문. 오정미에 따르면, 일부러 유아인과 닮은 아역 배우를 캐스팅했다고 한다.] 이런 꿈은 종수가 불 타는 것에 희열을 느낄 수 있다는 걸 보여준다는 시각뿐만 아니라, 종수가 벤을 동경하는 것을 나타낸다고 보는 시각도 있다. 반면 [[이동진]]은 종수가 해미와 벤에게 들은 말이 꿈에 반영된 것이라 [[http://extmovie.maxmovie.com/xe/movietalk/34395896|해석]]한다. [[https://youtu.be/qdbo9_KT_-w|#]] 벤이 비닐하우스를 태운다고 말했기 때문에 불타는 장면이 나오고, 해미가 우물 이야기를 했기 때문에 물에 젖어 있는 어린 아이가 나온다는 것. * '''노을씬 전체''' 남북의 공간적 경계에 해당하는 파주에서, 경계에 걸쳐진 시간을 의미하는 노을, 현실을 환상처럼 보이게 하는 [[대마]]와 술 등이 함께 놓이면서 신비로움을 만들어 낸다. 일종의 경계가 허물어지는 것을 은유하는 이 씬에서 벤은 '자연의 도덕'과 '동시존재' 등 자신만의 논리를 늘어놓고 종수는 처음으로 자신의 감정을 표출한다. 경계의 시간 속에서 종수와 벤은 자기 고백을 하고 해미는 하늘을 나는 새떼 앞에서 홀로 삶의 의미를 구하는 춤을 춘다. 이창동은 이를 두고 [[68운동]]에 빗대어 얘기했다. 자유롭고자 하는 해미 앞에 종수의 집에서는 태극기가 휘날린다. 태극기가 이데올로기화된 현재 거부할 수 없는 질서로 상징될 수 있다는 것. 대부분은 이 씬에서 벤이 비닐하우스를 그저 미끼 던지듯 메타포로 던졌고 종수가 억측한 것에 주목한다. 대개의 사람들은 현실에 지쳐있기 때문에 노을씬처럼 믿는 것과 믿지 않는 것의 경계를 허락하지 않고, 종수처럼 미스터리를 하나씩 제거한 후 나름의 답으로 현실을 지탱할 수밖에 없었다는 관점. * '''[[도검|칼]]''' 분노의 상징인 칼은 영화 초반 종수가 파주집에서 찾아내는 것으로 나온다. 그리고 칼은 종수의 아빠 것이다. 결국 종수가 이 칼을 쓰는 것은 부모 세대의 분노가 자녀 세대에게 이어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런 관점의 연장선으로, 종수가 극중 초반에 칼을 찾아냈기 때문에 결국 종수에게 선택과 결말은 이미 정해져있었다고 보는 사람들도 있다. 또한 허름한 창고 안 금고 속에 감추어있다는 점에서 종수의 숨겨진 분노와 폭력성을 의미할 수도 있다. 또한 종수가 벤의 집 화장실에서 보았던 함 속의 미용 도구와 대응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